선입견의 종류들
1. 경상도/전라도를 가르는 '장소론'..이같이 출신 지역이나 학벌에 따라 인간을 평가하는 '편견', '속단'
2. 전혀 다른 종류지만 한가위 때마다 고향에 내려가는 사람들. 이성의 법칙이 마련해 줄 수 있는 어떤 '이유','근거'도 없는 우리가 ' 전통'이라고 부르는 것들.
3. '교양'으로서 성립되는 선입견들 즉, 이성의 추리를 통해서가 아닌, 사회생활을 통해 공공 안에서 습득한 '감각'
1번의 선입견은 분명 지양되어야 할 것이지만, 2번, 3번의 선입견은 오히려 우리 삶의 일부로서 해명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같이 선입견의 종류가 다양한 만큼 선입견의 문제는 오로지 '선입견 없는 사유는 가능한가'라는 물음을 통해서만 접근해서는 안 된다. 선입견의 서로 다른 의미를 살펴보고, 그 가운데 어떤 선입견이 사유에서 제거되어야 하는지, 또 선입견이 사유와 의미 있는 관계를 맺고 있는지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
계몽주의와 전통으로서의 선입견
선입견을 가장 진지하게 문제에 부치고 비판했던 이들은 계몽주의자들이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중세에는 성서에 기록되고 교회가 선포한 계시의 신성한 말씀이 지식의 척도였으며, 그래서 지식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권위를 지닌 다양한 교의를 논의하는 일이 우선적이었다고 말한다. 근대에 들어와서 계몽주의의 길을 연 사람이 데카르트이다. 그는 보편적 지식으로서 성서의 권위에 의존하기 보다는, 과연 '나' 자신의 이성이 의심할 수 없이 참되게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졌다. 즉, 근대인들은 지식의 척도로 '나'의 '이성'을 제시했으며, 전통적으로 인정되어 온 권위는 '맹신'이라는 의미의 선입견으로 치부해 버렸다. 근대인들이 이성을 중세교회의 교리 같은 선입견에서 자유롭게 만듦으로써, 인류는 오늘날에 이르도록 굉장한 지식의 진보를 이루어왔다. 예)천동설vs지동설 , 창조론vs진화론 . 그러나 과학은 이성만 가지고 사태에 접근하지만, 그 접근을 가능케 하는 '관점'은 역사적으로 '미리' 형성되어 있다는것, 바로 역사를 통해 형성된 선입견을 통해 상속된 것이라는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사실 우리는 세상에 '이미' 문제로 제기되어 있는 것만을 우리의 탐구주제로 설정하고 있다.
사유의 공리로서의 선입견
선입견은 이성과 대립하는 것이기보다는 이성이 사용되기 위한 조건일 수 있다. 과연 '이성 사용의 절차 자체 안에는'아무런 선입견도 들어 있지 않을까? 이성은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만 충실하고자 하기 때문에, 다른 어떤 것도 자신의 '전제'가 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즉, 이성은 늘 '무전제'에서 진리에 대한 사유를 시작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오로지 이성만을 사용해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생각도 하나의 전제 위에 서 있다. "사유자는 사유자로서 '참된 것'을 원하고 사랑한다"라는 전제가 그것이다. 들뢰즈는 이를 '선의지의 공리'라 불렀다. 이 공리는, 진리는 진리를 인식하고자 하는 '자발적인 의지'를 가지고 있는 주체에 의해서만 알려진다는 '선입견'을 표현하고 있다. 이 '선입견 자체'는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가? 이 선의지의 공리의 보편적 타당성이 근거를 가지지 못하는 이상 이 공리는 임의적인 선입견이며, 이 임의적인 선입견을 기반으로 얻어진 것 역시 진리가 아닌 임의적인 것, 한낱 '견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무전제에서 사유를 시작하기
그렇다면 그러한 선입견조차 없는 사유는 어떻게 가능할까?이는 사유를 시작하게끔 강제하는 것과 마주쳤을때 시작한다는 것을 보임으로써 밝혀볼 수 있을 것이다. 하이데거는 '깊은 숙고를 요구하는 것'이 외부에서 우리 정신을 자극했을 때 비로소 사유는 시작된다고 말한다. 같은 맥락에서 니체는 진리는 자발적 의지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닌 외부로부터의 '상처'같은 '강제'를 겪을 때 시작된다는 것을 <즐거운 지식>에서 명시하고 있다. 들뢰즈가 다음의 구절에서 말하는 바가 이런 '충격'과 '사유의 탄생'사이의 필연적 관계이다. "진리찾기는 비자발적인 것의 고유한 모험이다. 사유하도록 강요하고 사유에 폭력을 행사하는 어떤 것이 없다면 사유란 아무것도 아니다." 참된 것에 대한 사유는 무전제에서, 외부로부터 상처와 충격을 겪었을 때 비로소 시작될 수 있다.
결론
삶은 온갖 편견과 속단으로 가득 차 있다. 이성적 사유는 이러한 편견을 삶에서 추방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다른 한편 우리는 어떤 선입견이라도 배제하려는 이성도 '전통적으로' 상속되어 온 기존의 문제의식이라는 선입견을 벗어나서 사유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전통과 관습이라는 선입견도 막무가내로 강요될 수 있는것이 아니라, 이성의 논리적 사유와 배치되지 않을 때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닌가? 따라서 '선입견 없는 사유'가 가능하지에 대한 탐구는 '이성 자체의 사유 절차' 안에 어떠한 선입견도 없는지를 시험해 보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진리에 대한 사유의 자발적 친화성'을 선입견으로 전제하지 않는 사유는, 오로지 외부로부터의 충격과 상처가 사유의 시작을 강제했을 때 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또다른 질문. 그럼 우리는 본래 '수동적인' 존재인가, '자유'가 위치할 자리는 어디인가...?생각해 볼 만하다.
1. 경상도/전라도를 가르는 '장소론'..이같이 출신 지역이나 학벌에 따라 인간을 평가하는 '편견', '속단'
2. 전혀 다른 종류지만 한가위 때마다 고향에 내려가는 사람들. 이성의 법칙이 마련해 줄 수 있는 어떤 '이유','근거'도 없는 우리가 ' 전통'이라고 부르는 것들.
3. '교양'으로서 성립되는 선입견들 즉, 이성의 추리를 통해서가 아닌, 사회생활을 통해 공공 안에서 습득한 '감각'
1번의 선입견은 분명 지양되어야 할 것이지만, 2번, 3번의 선입견은 오히려 우리 삶의 일부로서 해명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같이 선입견의 종류가 다양한 만큼 선입견의 문제는 오로지 '선입견 없는 사유는 가능한가'라는 물음을 통해서만 접근해서는 안 된다. 선입견의 서로 다른 의미를 살펴보고, 그 가운데 어떤 선입견이 사유에서 제거되어야 하는지, 또 선입견이 사유와 의미 있는 관계를 맺고 있는지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
계몽주의와 전통으로서의 선입견
선입견을 가장 진지하게 문제에 부치고 비판했던 이들은 계몽주의자들이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중세에는 성서에 기록되고 교회가 선포한 계시의 신성한 말씀이 지식의 척도였으며, 그래서 지식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권위를 지닌 다양한 교의를 논의하는 일이 우선적이었다고 말한다. 근대에 들어와서 계몽주의의 길을 연 사람이 데카르트이다. 그는 보편적 지식으로서 성서의 권위에 의존하기 보다는, 과연 '나' 자신의 이성이 의심할 수 없이 참되게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졌다. 즉, 근대인들은 지식의 척도로 '나'의 '이성'을 제시했으며, 전통적으로 인정되어 온 권위는 '맹신'이라는 의미의 선입견으로 치부해 버렸다. 근대인들이 이성을 중세교회의 교리 같은 선입견에서 자유롭게 만듦으로써, 인류는 오늘날에 이르도록 굉장한 지식의 진보를 이루어왔다. 예)천동설vs지동설 , 창조론vs진화론 . 그러나 과학은 이성만 가지고 사태에 접근하지만, 그 접근을 가능케 하는 '관점'은 역사적으로 '미리' 형성되어 있다는것, 바로 역사를 통해 형성된 선입견을 통해 상속된 것이라는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사실 우리는 세상에 '이미' 문제로 제기되어 있는 것만을 우리의 탐구주제로 설정하고 있다.
사유의 공리로서의 선입견
선입견은 이성과 대립하는 것이기보다는 이성이 사용되기 위한 조건일 수 있다. 과연 '이성 사용의 절차 자체 안에는'아무런 선입견도 들어 있지 않을까? 이성은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만 충실하고자 하기 때문에, 다른 어떤 것도 자신의 '전제'가 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즉, 이성은 늘 '무전제'에서 진리에 대한 사유를 시작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오로지 이성만을 사용해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생각도 하나의 전제 위에 서 있다. "사유자는 사유자로서 '참된 것'을 원하고 사랑한다"라는 전제가 그것이다. 들뢰즈는 이를 '선의지의 공리'라 불렀다. 이 공리는, 진리는 진리를 인식하고자 하는 '자발적인 의지'를 가지고 있는 주체에 의해서만 알려진다는 '선입견'을 표현하고 있다. 이 '선입견 자체'는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가? 이 선의지의 공리의 보편적 타당성이 근거를 가지지 못하는 이상 이 공리는 임의적인 선입견이며, 이 임의적인 선입견을 기반으로 얻어진 것 역시 진리가 아닌 임의적인 것, 한낱 '견해'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무전제에서 사유를 시작하기
그렇다면 그러한 선입견조차 없는 사유는 어떻게 가능할까?이는 사유를 시작하게끔 강제하는 것과 마주쳤을때 시작한다는 것을 보임으로써 밝혀볼 수 있을 것이다. 하이데거는 '깊은 숙고를 요구하는 것'이 외부에서 우리 정신을 자극했을 때 비로소 사유는 시작된다고 말한다. 같은 맥락에서 니체는 진리는 자발적 의지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닌 외부로부터의 '상처'같은 '강제'를 겪을 때 시작된다는 것을 <즐거운 지식>에서 명시하고 있다. 들뢰즈가 다음의 구절에서 말하는 바가 이런 '충격'과 '사유의 탄생'사이의 필연적 관계이다. "진리찾기는 비자발적인 것의 고유한 모험이다. 사유하도록 강요하고 사유에 폭력을 행사하는 어떤 것이 없다면 사유란 아무것도 아니다." 참된 것에 대한 사유는 무전제에서, 외부로부터 상처와 충격을 겪었을 때 비로소 시작될 수 있다.
결론
삶은 온갖 편견과 속단으로 가득 차 있다. 이성적 사유는 이러한 편견을 삶에서 추방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다른 한편 우리는 어떤 선입견이라도 배제하려는 이성도 '전통적으로' 상속되어 온 기존의 문제의식이라는 선입견을 벗어나서 사유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전통과 관습이라는 선입견도 막무가내로 강요될 수 있는것이 아니라, 이성의 논리적 사유와 배치되지 않을 때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닌가? 따라서 '선입견 없는 사유'가 가능하지에 대한 탐구는 '이성 자체의 사유 절차' 안에 어떠한 선입견도 없는지를 시험해 보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진리에 대한 사유의 자발적 친화성'을 선입견으로 전제하지 않는 사유는, 오로지 외부로부터의 충격과 상처가 사유의 시작을 강제했을 때 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또다른 질문. 그럼 우리는 본래 '수동적인' 존재인가, '자유'가 위치할 자리는 어디인가...?생각해 볼 만하다.



덧글